#0 다시, 할리문으로.

긴팔원숭이 과학자들의 이야기

머나먼 인도네시아의 열대우림에서 긴팔원숭이라는 동물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현장으로부터 생생하게 들려주는 이야기를 이제부터 주기적으로 연재하고자 합니다.
긴팔원숭이 연구는 한 때 중단위기에 놓였다가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다시 기회를 맞았습니다.
밀림으로부터 전해온 소식을 통해 과학자들과 야생동물들의 삶을 엿보길 바랍니다.


 

#0 다시, 할리문으로.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도시에서의 마지막 연구허가 서류작업을 마치고 드디어 할리문으로 들어왔습니다. 보고르의 교통 체증을 지나고, 길이 점점 좁아지면서 아스팔트에서 돌길로 바뀌고, 주변이 점점 녹색으로 뒤덮여가는 변화를 보며, 에어컨을 끄고 창문을 활짝 열면 들어오는 시원한 공기를 마시면서 이제야 할리문으로 돌아가는 것이 실감이 났어요.

한국에서 할리문으로 돌아가길 고대하던 시간이 벌써 아득히 먼 일이었던 것만 같아요. 여기서 지내던 날의 평소 같았으면 바로 차에서 골아 떨어졌겠지만, 오랜만에 할리문으로 들어가는 길이라 설레서 바깥 풍경을 하염없이 바라보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왔습니다. 울퉁불퉁한 돌길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차 안에서 1시간 넘게 시간을 보내는 것도 오랜만이라 쉽게 잠이 들지 않은 것도 있지만, 어쨌든 덕분에 할리문으로 들어오는 길을 놓치지 않고 감상하며 올 수 있었습니다. 

약 1년 3개월만에 돌아온 할리문.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바뀐 것은 없는 듯 그대로입니다. 차 밭 길에서 쭉 내려와 구멍가게를 지나고, 다리를 건너고, 그리고 약간 오르막을 오르면 나오는 회색 벽의 집. 집에 들어서는 순간, 한국에 단 며칠 들렸다 돌아온 것처럼 느껴졌어요. 마치 먼 여행을 하고 마침내 집으로 돌아온 느낌처럼요. 2016년 할리문에서 처음 연구를 시작했을 때, 연구실 식구들이 할리문이 나의 제 2의 고향이 될 거라 말했던 기억이 납니다. 고향이라는 장소가 주는 느낌은 그곳을 떠났다가 돌아오기 전까지는 모르는 것이죠. 그리고 다시 방문하는 장소가 모두 고향이 될 수도 없죠. 하지만 할리문을 떠나고 1년 만에 돌아오니, 이 곳이 정말 나의 제2의 고향이 되었구나 확실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도착했을 땐 연구보조원들은 아직 숲에서 돌아오지 않았고 요리를 해주는 아못 부인만 집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오랜만에 안고 인사하는데 반가움에 괜시리 눈물이 나더라고요.

오랜만에 돌아온 나의 제 2의 고향. 그 동안 변한 것이 무엇이 있나, 나의 흔적이 아직 남아있나, 괜히 집안 곳곳을 한참 서성거렸습니다. 연못 담장이 아예 사라진 것, 화장실 문이 새것으로 바뀐 것 (그럼에도 각도가 딱 들어맞지 않아 잠금 장치가 제 역할을 잘 못하지만), 거실 소파의 위치가 바뀌는 등 작은 변화들이 있긴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이 곳의 익숙한 전경과 분위기, 그리고 편안함은 여전히 그대로입니다. 한국에서 가져온 짐들을 들고 1년 전 내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떠날 때 모습 그대로 침대, 이불, 커튼, 책상, 거울도 꼼짝도 않고 있더라고요. 다만 사람이 비어 있는 동안 습하고 꿉꿉한 묵은 내가 베었지만, 점차 옅어지겠죠. 

드디어 연구보조원들이 숲에서 집으로 돌아오고, 제가 활짝 웃으며 “잘 지냈니? 건강하지?”하며 반겼는데 어쩐지 저만큼 반가운 기색은 아니어서 머쓱했다가, 쑥스러움이 많은 이들이었다는 게 기억나 그냥 혼자 피식 웃고 말았습니다. 여기에 도착하기까지의 여정을 되새기며, 변함없는 이곳에 돌아와 그리웠던 사람들을 다시 조우했다는 감격에 여러가지 감정과 생각도 들었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다시, 할리문에 오게 되어 행복하다는 것 말이죠. 


최아현 연구원